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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말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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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말했다.

C빌런 2024. 2. 2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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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써내려 간다면 마음이 무거울 것 같았다. 막상 키보드를 두들기는 내 모습을 보니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감정이 느껴진다. 사실은 이미 폭풍우가 지나가고 마음은 착 가라앉은 바다와도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인생에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변화를 느낀 시점이 있다. 그것을 이끌어 준 사람은 '자청'이라는 사업가이자 유튜버였다.

 

  그의 성공신화와 책을 읽고 글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성공학은 나도 책 읽고 똑똑해져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과 무한한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그 길에 깊은 회의를 느꼈고, 스스로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동기부여 뒤집기'라는 한 유튜버의 영상을 보면서 이 생각이 물꼬를 터기 시작한다. 처음 그 영상을 봤을 때는 뒷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뒷골 땡김과 심장이 빠르게 뛰는 듯한 기분이 들며 분노감을 느꼈다.

 

  '너가 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라며, 열등감에 뒤처진 한 명의 사람이라고 치부하려고 했다. '자청'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날뛰면서 평소에는 잘 달지도 않던 댓글에 분노를 표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잔잔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나하나 말하면서 주장에 대한 근거와 의문점을 제시하는 그 영상은 천천히 내 분노를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동기부여 뒤집기'는 자신이 발견한 또는 제보받은 증거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을 것이고, 자청은 거기에 대한 답을 하면 되는 심플한 영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응과 실제 내가 구매한 강의에 대해 환불 문의를 하면서 느껴진 프드프 측의 입장이 마음을 차갑게 만들어 주었다.

 

  '자청'은 과대광고를 토대로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에 대한 해명은 추후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나 역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청이 유튜브를 시작하던 당시 그는 아트라상이라는 재회상담 기업을 창업하면서(아트라상에 대한 의문점도 많이 제기되고 있는 부분) 얻은 노하우로 클래스 101에서무자본 창업강의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유튜브를 성공했을 때, 그는 자신의 마케팅과 글쓰기 능력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했지만, 이미 그에게 형성된 수많은 팬들과 추종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튜브 역시 빠르게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유명세를 얻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업들이 서로 연관되면서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추종자들의 후원이 더 크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추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성공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공방식을 추종자들과 팬덤의 후원이 아닌 자신의 글쓰기와 마케팅, 지적인 능력을 자신이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며, 그런 지식사업을 중점으로 돈을 벌어온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가 지식산업에 빠져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멍청하다는 생각에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이 밀려들어왔다. 차라리 인정하지 않고 자청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그 영상에 비난의 댓글을 달고 속 시원하게 넘어갔다면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지는 않지만 수십 권의 뇌과학, 생물학, 경제학, 철학 등 여러 책을 읽으며 다짐했던 머릿속에 들어있는 한마디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자'. 자신의 삶의 중심에 있던 것이 부정당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고통을 느꼈다.

 

  책이란 것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책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고 그것들에 내 삶을 맡길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할까? 근원적인 물음들이 다시 밀려들어온다. 

 

  나는 누군가 해답을 주기를 바랐다. 그러고 이번에는 '동기부여 뒤집기' 그 사람의 다른 영상들을 보았다. 여러 영상을 보면서 그는 '대부분의 책은 권위를 업고 대중들의 돈을 빨아먹는 쓰레기라고 주장한다. 책을 읽는 것보다 직접 무언가를 실천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 말을 듣고 또 혹하였다.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생각해야겠다. 내가 그 사람에게서 받아들일 것은 '비판적 생각'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비판적 사고'이니까. 

 

  머릿속으로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살면서 거의 실천한 적 없는 '비판적 생각, 비판적 글쓰기'의 중요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다음의 고민이 또 생긴다. 모든 주장, 모든 근거들에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인가? 

 

  이전에 읽었던 철학책이 생각난다. 시민들에 의해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그 시민들에 의해 얼마 안 가서 나폴레옹의 전제정치를 환영하며 받아들이던 사람들의 모습. 

 

   그 책과 역사를 토대로 보건대, 나를 비롯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온전히 자신을 책임지는 삶을 살기 힘들어하는 듯하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 해결하며, 비판하고 수용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피곤하고, 힘들고, 에너지를 많이 쏟아붓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가 답을 내려주길 원하고, 그 방법대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것이 편하다.

 

  현대는 민주주의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오늘날의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비판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정답을 따라 길을 걸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자신이 원해서 그 사람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주체성에 대한 착각). 

 

  나는 무언가를 인정해야 함을 느낀다. 나는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없고, 매 순간 나만의 정답을 세우고 개척해 나갈 자신이 없다. 그렇게 살아나갈 자신이 없다. 글을 적다 보니, 나는 또 한 가지의 자신에 대한 의문을 느낀다. 왜 그렇게 스스로 잘할 수 없음에 집착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지?

 

  나의 부족한 것이 비판적 사고임을 알고, 그것을 못함에 실망한다. 내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남한테 휘둘려 왔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나는 똑똑하다는 생각이 내 삶에 중심이었는데 그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언제부터 스스로의 지적능력에 얽매이게 된 것일까? 내가 똑똑하지 않으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한 걸까? 내가 왜 완벽해야 할까? 어린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똑똑하고,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하던 그때부터였을까? 그런 나를 친구들이 부럽게 바라보던 모습에서 느낀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나의 근원에 대한 추측뿐 확실함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적고 보니 나의 근원을 토대로 흐르고 있는 삶의 방향성은 남들에게 뛰어나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있음이 느껴진다. 아니다. 사실은 그게 아닌 것이다.

 

  적다 보니 지금 적으려는 근원이 좀 더 나 자신을 말해준다는 믿음이 생긴다. 나는 누군가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남들은 다 할 줄 아는데 나만 할 줄 모르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런 나를 부끄러워하며 수치스러워했다. 어린 시절 느낀 수치감이 방금 머릿속을 지나갔다.

 

  내 삶의 방향성은 남들보다 뒤처지기 싫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평온하게 살다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뛰어남을 느끼면, 나도 그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발버둥을 처왔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다시 적으니 내가 나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내가 행복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 근원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남들만큼 하면 나도 행복한 것이다.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사람들 간에 긴밀하게 기술적으로만 연결된 것이 불행함을 불러오는구나. 

 

   행복감을 불러오기 위해서 몇 가지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디지털 디톡스. 두 번째, 글쓰기와 관심분야 공부. 디지털 디톡스는 각 종 SNS에 대한 사용시간을 통제하는 것이다. 나의 눈은 너무 높아져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완벽주의. 모두 그곳에서 기인한다. 

 

  '자청'이 그렇게 강조하던 글쓰기. 집어던질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생각을 많이 정리하고, 깨달음을 남기는 행위에 기쁨을 느낀다. 남들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라는 나의 기준은 지적활동 및 그로 인한 사회적 위치와 결부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는 필요한 정보만 받아들이고 나머지 정보는 통제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우직하게 공부하며 지적활동을 하는 것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글을 적으면서도, 이게 정답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정답이 아니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자청이 말하는 인생의 공식은 사실 허구였다는 것을 인식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나가며 성장하겠다는 다짐이 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던 삶에서 남이 만들어준 생각대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적당히 남의 생각 따라 하면서, 내 것을 즐기는 삶으로 넘어가야겠다. 이다음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고민이 오는 순간 또 한 번 이 글을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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