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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가 가끔 또는 자주 멍청한 이유,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 (from. 클루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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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가 가끔 또는 자주 멍청한 이유, 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 (from. 클루지)

C빌런 2022. 5. 25.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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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초반, 나는 어릴 때부터 원하던 대학에 가기 위해 3수를 했었다. 재수를 허무하게 실패했음에도 부모님에게 염치 불고하고 한 번 더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재수의 실패는 혼자서 독학을 해서 스스로 통제를 못했기 때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왕 하는 김에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경기도 광주에 있는 기숙학원에 등록하였다.


  기숙학원을 다녀보거나 자녀를 보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기숙학원에 다니는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 10년 전 기준으로 매달 200 ~ 300만 원에 달하는 돈을 학원에 부었는데, 1월부터 11월까지 다녀야 했으니 혼자 4인 가족 벌이를 하셨던 아버지에게는 적지 않은 비용이었다.


  심지어, 학원비를 빼고 따로 용돈으로 쓰라고 주시는 돈에 더해, 별도 학원비를 제외하고 선생님들마다 특강이라도 개설하면 학생들의 불안감은 저절로 수강신청을 하게 되었고 이는 추가적인 부담을 지게 만들었다. 부모님께 항상 죄송한 마음으로 학원 생활을 했었다. 고액의 비용이 드는 학원 생활이었지만, 다른 몇몇 학원 동기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던 듯했다. 그들은 점심시간, 야간 자습시간이나 휴일에 항상 학원 주차장에 모여 하루 종일 축구를 찼다.


  당시 나는 그런 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놈들은 매일 300만원짜리 축구를 하는 멍청한 녀석들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비난했다. 그들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이 어리석지는 않았다고 생각이 든다. 오히려, 축구를 통해 적절히 스트레스 관리를 하면서 공부에 대한 효율을 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건 나였다. 나는 부모님에게 큰 짐을 지우고 온 죄인이라고 여겼고, 마땅히 그런 짐을 지운 사람들은 죄인의 입장에서 학원생활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잘’ 했으면 모르겠지만, 나는 한 가지 더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기숙학원 생활 처음 3개월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지친 몸을 이끌고 교실에 가서 아침을 먹기 전까지 혼자서 자습을 했다. ‘3당 4 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적어도 4시에는 일어나면 내가 원하는 대학에는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처음 한 달은 공부가 잘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체력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새벽공부는 공부가 아니게 되었다. 새벽 4시에서 6시까지 ‘잠 안자기’ 연습으로 바뀐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런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라고 자기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선생님들은 주어진 시간에만 열심히 해도 충분하다고 하셨지만, 그저 스스로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위안을 받기 위해 그 생활을 이어나갔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공부였지만, 그렇게 노력하는데도(열심히 하는 척하는 노력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열심히 한다고 믿었다.) 주변 친구들에 비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질문을 멈추게 되었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몰래 교무실 가서 한 두 개 정도 질문을 하거나 이런 건 몰라도 된다고 스스로 ‘정신승리’하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성적은 내가 원하는 만큼 오르지 않았다. 이 멍청한 생활의 결말은 결국 원하던 대학을 갔기에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원래는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성적이었지만 하늘이 도와 간신히 들어갔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클루지(Kluge)?」

  이런 20대 시절의 모습이 어린 시절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이것이 ‘클루지’임을 깨달았다. ‘클루지’란 어떤 문제에 대해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을 뜻한다.


  선생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3당 4락’ 같이 내가 믿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만 찾는 ‘확증 편향’, ‘학원에 온 죄인들이 웃고 즐기며 축구를 하는 건 사치다’라는 내 신념에 맞지 않은 동기들에 대한 비난의 감정을 가진 ‘동기에 의한 추론’, 모의고사 결과를 통해 공부법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해야 했지만 ‘시험 난이도가 평상시보다 어려웠다, 문제 풀 때 컨디션이 안 좋았다’와 같은 이유로 현재 공부법에는 문제가 없다고 두둔한 ‘인지 부조화’.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클루지’들의 나열이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스스로 멍청했다고 느낄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할 때도 있다. 심지어 신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몇 초 만에 바뀌기도 하고, 계획은 그저 계획에 그치는 것이 다반사다. 우리는 스스로를 ‘고등하고 지적인 생물’이라며 치켜세운다. 확실히 내 앞을 지나가는 비둘기보다는 내가 똑똑한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빈번히 실수라 불리는 멍청한 짓을 연발하는 존재이다.

참새와 비둘기 사진
얘들보다 내가 똑똑한 건 맞을지도..?

  어째서, 우리는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할 줄 아는 고등한 생물임에도 이렇게 불완전할까? 답은 이미 제시했다. 우리의 마음이 ‘클루지’이기 때문이다. 나의 첫 번째부터 지금까지의 칼럼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예상할 수도 있으실 것이다. 그렇다. ‘진화심리학’ 이야기다.


   조상 인간들부터 현대 인류까지 수백만 년의 세월은 ‘진화’라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진화’는 발생한 ‘문제’나 ‘해결과제’에 대해 항상 최선의 효과적인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상황에 맞추어 ‘이렇게라도 하는 게 더 낫겠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면, ‘로그라이크’ 장르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겠다. 로그라이크는 캐릭터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 단, 한번 선택을 하면 해당 게임이 종료될 때까지 절대 바꿀 수 없기에 현재 상황에 맞추어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아이템, 능력 등)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매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원하는 선택지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나마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게 태반이며, 심지어 ‘다음의 선택’이 ‘지난번 선택’의 영향을 받아 내가 원하는 선택지가 나와도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로그라이크 게임화면

<로그라이크 장르 게임 예시, 로라라라 선택의 탑>


「우리는 클루지 덩어리」

  인간의 마음 역시 항상 최신의 것으로 교체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전 것에 덧칠을 하는 방향으로 발전을 해왔기에 우리에게 ‘클루지’라는 문젯거리가 발생하게 된다. 다음은 우리가 매일 쉽게 저지르는 몇 가지 '클루지'들이다.


  첫째, ‘확증 편향’‘동기에 의한 추론’이다. ‘확증 편향’은 ‘우리의 신념을 위협하는 것보다, 우리의 신념에 잘 들어맞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을 뜻하고, ‘동기에 의한 추론’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싶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즉, 내가 처한 상황에 유리한 정보들만 선별해서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들은 논리와 타당성에 상관없이 부정하는 심리이다. 이 클루지는 지금의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대표적인 클루지이다.


  단편적인 예로, 명절날 모여 어른들끼리 정치 얘기를 할 때 흔히 볼 수도 있다. ‘보수’ 성향의 아버지와 ‘진보’ 성향의 친척이 대통령이 잘하니 못하니, 정책이 개판이니 하며 날이 서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대립에는 설득이 없다. 그저 자신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고 상대의 주장과 근거는 서로 부정한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빨갱이 소리를 하시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시면, 아버지는 기세 등등해진다. 서로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도 누군가의 동조에 기세 등등해지는 것도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그저 본인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둘째, ‘후광 효과’‘갈퀴 효과’이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이루어진다. 사전에 ‘매력적으로 평가받은 아이의 얼굴’과 ‘못생겼다고 평가받은 아이의 얼굴’ 사진을 준비하여 각 대상자들에게 둘 중 하나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진 속의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돌이 든 눈 뭉치를 던졌다. 아이의 행동에 대해 분석해보라’


  실험에서 ‘매력적인 아이 얼굴’을 본 사람들은 아이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거나, 슬프거나 화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심이 많은 대답을 한 반면, ‘못생긴 아이 얼굴’을 본 사람들은 아이가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아이이기 때문에, 흉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라는 답변을 했다. ‘매력적인 아이 얼굴’을 본 사람들의 설명을 ‘후광 효과’, ‘못생긴 아이 얼굴’을 본 사람들의 설명을 ‘갈퀴 효과’라고 한다.


  인간의 ‘배우자 선호’를 통해 진화한 ‘미의 기준’을 생각해 보았을 때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실험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적나라한 부분을 알아야 감정의 원인을 인지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스스로 짐승이 될지 인간이 될지 선택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깨달은 진화 심리에 가치판단을 하지 말고, 그저 하나의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마음이 더 가벼워지지는 않을까 바라본다.


  다음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된 유명한 ‘전차 살해 실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우리의 의사결정은 ‘클루지’ 투성 이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덕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 ‘도덕적 선택’이나 ‘도덕적 직감’에 영향을 받아 의사를 결정한다.


  철로에 작업하는 인부 5명이 있다. 그런데, 작업하는 철로로 열차가 달려가는 중이다. 당신은 열차의 선로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선로를 바꾸게 되면 다른 선로의 1명이 죽게 된다. 이 경우 대부분 ‘5명’보다는 ‘1명’의 희생이 합리적이라 판단하여 선로를 바꾼다.


  이야기를 바꿔서, 상황은 같다. 작업하는 인부 5명, 달려오는 열차. 단지 당신은 철도 위 육교에 있고, 당신 옆에 당신보다 덩치가 큰 한 명이 같이 열차를 지켜보고 있다. 열차가 육교를 지나기 전, 옆의 사람을 밀어서 선로를 막으면, 열차를 막고 5명을 살릴 수 있다.


  방금 전 이야기와 동일한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이지만, 대부분 사람을 미는 행동을 거부한다. 차이는 ‘직접적’이었는가에 따른다. 눈에 안 보이는 위치의 사람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따라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도덕적 선택),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것은 실제 살인행위이기에 꺼려지기 때문이다(도덕적 직감). 동일한 의사결정이지만 단순히 직접적으로 죽이냐 간접적으로 죽이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선택과 도덕적 직감에 대한 유명한 실화가 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국군과 독일군은 전선에서 하루 비공식적인 휴전을 합의했다. 양국의 군사들은 휴전 기간 동안 얘기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고, 일부는 같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 휴전이 종료되고 다시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서로를 죽일 수 없었다. 상대가 ‘단순한 적’에서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된 사람’으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이유」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이자 사업가의 추천을 통해 알게 된 ‘클루지’라는 책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그것을 깨달은 지금에도 앞으로 한결같이 어리석을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해 준 책이다. 글의 서론에서 20대의 나는 클루지 투성이었음을 회상했지만, 사실 지금도 별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지난주부터 하기로 계획했던 것을 미루다가 내일이 기한으로 다가오자 부랴부랴 처리했으며, 성공한 사람들의 유튜브를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하는 한편, ‘분명 저 사람은 원래부터 뛰어났기 때문’이라던가 ‘나도 저런 환경이었으면 성공했겠다’라고 단정할 때도 있다. 다만, 그 행동이 클루지임을 인지하게 되면, 다음은 그 행동을 하기 전에 점점 꺼려지는 것이 늘었다.


  ‘책 한 권 읽었다고 인생이 바뀌냐?’, ‘인생이 바뀔 정도라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하는 줄 알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진화심리학 관련 책들과 이 ‘클루지’를 읽고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에 대한 공포’는 우리 조상들이 옛날에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온 클루지임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손에 쥔 것을 놓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소중한 시간 내서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다른 책들은 모르겠지만 이 책 한번 읽어보시면서 자신들의 클루지를 찾아보시고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글을 쓰다 보니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이런 글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했음에도, 이런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글자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것에도, 20대 시절 멍청한 나를 믿고 지원해 주신 것에도, 사람과 세상에 마음이 상했을 때 돌아갈 곳을 만들어 주심에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 수 있는 삶의 여건을 만들어 주심에 깊은 사랑과 신뢰를 느끼고 감사함을 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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